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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다. 세탁 시기가 꽤 지나 까실까실한 느낌을 전해주는 카펫 털실을 꾹꾹 밟아 가며 겨우 도착한 안방 문 앞에서 뒤돌아섰다. 이 자리에 주저앉으면 금방이라도 잠이 들어버릴 것 같다.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파트 현관 입구 우편함에서 꺼내온 청구서를 빠르게 훑어보고서는 머리 위로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카펫 위에서 덩그러니 누운 채였다. 까실한 카펫이 부드럽고 윤기 있는 털로 변한 것을 상상하며 내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세탁소에 맡기리라 다짐했다. 그러다가 다음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거실 카펫 위에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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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나 가임기간이야. 피임해야 해.”
“저 튼실한 허벅지. 나보다 굵어 보이는 팔뚝. 분명 나보다 힘이 세어보이는, 학교농구부원을 내가 힘으로 찍어눌렀겠냐고, 바른말 잘하기로 유명한 입 놔두고 그런 말 왜 못하냐고…, 소나 돼지, 심지어 집에서 기르는 댕댕이 임신기간이나 발정기, 교미시기도 줄줄 외드만 지 몸을 몰라? 이거 내가 어디서 주워들은 잡학도 아니고 중3이나 1학년이면 이미 다 배우는 내용인데 말이지. 비록 한 학년 아래이긴 하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나름 학과 성적도 우수하고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니가?”
내 애가 맞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남자로 너무 초라하고 비겁한 핑계의 행위 같았다. 이제 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생각도 잠시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 생각보다 더 크게 다가와 가슴 뛰게 했다. 트로트 가사에 나오는 '가슴이 무너져 내려요.'라는 표현을 이럴 때 사용하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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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를 매만지며 잠에서 깨어났다. 혹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꽤 세게 부딪친 게 틀림없다. 잠결에 몸부림치면서 거실 탁자 아래까지 뒹굴었나 보다. 꿈속에서 말이다. 일어나면서 부딪힌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살펴보려고 욕실 거울 앞에 섰다. 무엇이건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로서는 무의식에서 나온 당연한 행동이었다. 머리카락을 헤쳐가며 찾아보았지만 보일 리가 만무하다. 손거울이라도 있어야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눈으로 확인하는 행위를 포기했다. 그 대신 꿈속을 되뇌어 본다. 그때 그녀가 그렇게 이야기했더라면 내 행동은 달라졌을까. 그날 콘돔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기억났다. 그녀가 그렇게 이야기했더라면 그녀 몰래 자위나 하고 잠들었을지도, 아무튼 학창시절 꿈꾸던 삶과는 멀어도 너무 먼, 달라도 너무 다른 지금의 삶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잠시뿐 허탈한 미소를 머금고 욕실을 걸어 나왔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 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문턱을 넘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는지 문틀을 잡고 느리게 거실로 걸어 나왔다. 그녀와 함께 마신 두 세잔에 불과했던 소주가 그에게는 지금까지도 여운이 남아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고 일어났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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