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대디

세번째 이야기..., 이어서...,

눈마 2019. 3. 23. 01:22











그랬다.


이번 가을은 어느 해 보다도 유난히도 짧았고 그만큼 겨울도 빠르게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맑기만 하던 하늘에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함박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북쪽 주차장에 나란히 열 맞춰 서 있는 자동차 가운데쯤 이 빠진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월동물자 수송을 위해 춘천에 다녀온다던 녀석의 자리다. 저녁엔 감자탕을 먹어볼까 하던 생각이 멀리 달아났다. 뜨거운 김과 함께 콧속을 자극하던 깻잎 향도 순식간에 눈 내리는 대기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직 눈이 오기에는 이른 시기, 일기예보에서도 눈이 온다는 소식은 듣지 못한 채 이번 겨울 첫눈을 맞이한 셈이다. 운전면허증에 잉크가 마른 이후 이런 대형자동차로 아직 설상 운전을 경험해보지 못한 녀석이다. 이야기만 들어 머리로만 알고 있을 뿐 몸으로 겪어보는 건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일 것이다. 머리로 기억해 내고 몸이 반응해 각종 운전 장치를 조작하기에는 자동차가 너무 크고 빠르다. 설상 운전 경험치가 축적되지 않았다면 반응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으리라.


굳은 표정으로 내리막과 커브 길을 조심스럽게 운행할 녀석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런 심리상태로는 평소 운동신경이 뛰어나다던 말을 듣던 녀석도 팔다리가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으리라.

 

창밖 북쪽 주차장에 가 있던 시선을 사무실 안으로 되돌리기도 전에 전화벨 소리가 울려왔다. 늘 불길한 예감은 비껴가지 않는다. 이날도 마찬가지다. 역시나 눈길에 미끄러져 길옆 배수로에 빠졌다는 소식이다. 마침 지나던 사람이 발견해 알려왔다. 다행히 운전했던 녀석도 옆자리 동승자 모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며, 다만 많이 놀라고 많이 당황했을 뿐이라고 전해왔다. 후에 그 녀석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신포 삼거리에서 흩날리기 시작한 눈이 용담계곡쯤에서는 이미 까만 아스팔트 도로가 하얗게 변해버렸다고 했다. 이날의 일은 일찍 시작된 겨울과 첫눈, 변화무쌍한 이곳 날씨 탓이라는 셈이다. 아무튼, 녀석 덕분으로 깻잎 향 도는 따끈한 감자탕 국물과 소주 한 잔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고, 늦은 시간 야식집 술안주 부대찌개에 공깃밥을 시켜 저녁을 대신했다.

 

이러니 생활비가 배로 들지.”


메뉴판에 적힌 부대찌개 가격을 보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이제 하루의 일과가 모두 끝났음을 안도하는 얼굴빛이다.


생활비, 특히나 돈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고 산 지가 꽤 오래되었다. 월급명세서를 받아 볼 때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내 월급이 얼마인지 모르고 지나간 적이 많았던 같다. 어떻게 보면 집안 살림에 무신경했었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또 아니다.


어린 나이에 애 딸린 엄마가 되어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궁색한 삶을 살게 했으니 가정 경제에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게 염치없는 짓 아닌가. 가정 경제뿐 아니라 집안 일에 대한 모든 것을 맡기고 싶었다. 설혹 다른 내 생각이 있더라도 그녀에게 그나마 작은 즐거움을 주려고 일체의 간섭을 않기로 했었다. 가끔 짜증을 내기도 했었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큰 실수였던 것 같다. 그릇이 안 되는 사람에게 너무 큰일을 맡겼다는 것. 자녀를 바로 키우고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나. 내가 지금 이렇게 일하고 있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우리 가족들을 위함이 아닌가. 나만을 위해서라면 세상 즐거움을 쫓아다니지 이 나이에, 이런 산골에 와 이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상대를 위한 어설픈 배려심은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건 결코 아닌 것 같다.


  

눈 왔어요. 첫눈이죠?”

 

밑반찬 몇 가지를 식탁 위에 옮겨놓으며 건네는 여사장의 인사말이다. 굳이 대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말투다.

 

부대찌개. 공깃밥 하나?”

 

대답하지 않아도 무얼 먹을지 아는가 보다. 오늘도 역시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뒤돌아 주방으로 걸어갔다. 부대찌개 아니면 동태찌개 정도가 이 집에서 식사용으로 먹을 수 있는 메뉴다. 그중 하나니 확률 50% 아닌가.

 

사실 이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부대찌개를 먹으려 했었다. 확률 50%를 맞춘 이 산골 주점 여주인은 자그마하지만 다부진 체격으로 그런대로 봐 줄 만한 얼굴이다. 거기에 유쾌한 성격으로 주당들 대하는 말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손님들 꽤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해서 시골이 그렇지만 누구랑 그렇고 그런 사이다. 주점 6개월 만에 얼마를 벌었다고 하더라.” 등의 확인 안 된 소문이 무성한 여인이기도 하다.


레깅스만큼이나 꽉 낀 청바지를 입어 엉덩이 선이 유난히 드러나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이 주방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오르는 부대찌개 냄비를 들고 엉거주춤 나타난 모습에서 불편함이 전해왔다. 자신도 불편했던지 냄비를 내려놓자마자 엉덩이 부분 천을 두세 번 당겼다 놓는다.

 

이거 불편하네. 갈아입고 나올게요. 식사하세요.”

 

그때까지도 몰랐다. 몰랐다기보다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게 맞을듯싶다. 아니 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는지. 돌아왔다면 무얼 하고 시간을 보냈을지. 저녁은 먹었는지. 또 태권도 도장은 시간 맞춰 다녀왔을지. 세탁해 베란다에 널어둔 도복을 찾지 못해, 그것을 핑계 삼아 아예 가려고 생각지도 않았을지…….』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그의 현실을 깨닫게 했는지도 모른다. 싱글대디는 먹는 시늉만 하다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음식값으로 만 원짜리 두 장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그만 가겠다는 인사도 없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물론 집으로 가기 위함이다. 골목 어귀에 묵묵히 그를 기다리던 그의 승용차 타이어도 바람 빠진 모습이다.